○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자는 계수(季綏)이고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홍의장군(紅衣將軍)은 별호이다.
○ 조부 지번(之藩)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오르 고 부친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등의 청요직을 지내고 의주목사(義州牧使)와 황해도감사(黃海道監司)를 지냈다.
• 1552년(1세) | 8월 28일 무인(戊寅) 해시(亥時) 의령현 세간리(현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출생 |
• 1554년( 3세) | 모부인 강씨 서거 |
• 1559년(8세) | 부 정암공(定庵公)의 용연정에서 형제들과 함께 독서 |
• 1566년(15세) | 자굴산(宣寧 소재) 보리사에서 독서, 유학에 침잠하면서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두루 관심을 갖다. |
• 1567년(16세) | 상산김씨(商山金氏)를 부인으로 맞이하다. |
• 1570년(19세) | 학문하는 여가에 사어서수(射御書數)를 익히고 무경(武經) ․ 병서(兵書)에도 방통(旁通)하다. |
• 1574년(23세) | 부 정암공(定庵公)이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하자 의주에 배종하여 지방행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다. |
• 1578년(27세) | 부 정암공(定庵公)이 사신으로 명경(明京)에 파견되자 배종하여 그곳 관상자로부터 「뒤에 반드시 큰 사람이 되어 명망이 천하에 떨칠 것이다」 라는 평을 듣다. |
• 1585년(34세) | 정시제이(庭試第二)에 입격했으나 논지(論旨)가 문제되어 파방(罷榜)당하자 과거를 포기했다. |
• 1586년(35세) | 부 정암공(定庵公)의 상을 당해 여묘하다. |
• 1589년(38세) | 탈상후 의령현동 기강 위에 둔지강사(遁池江舍)를 짓고 어조(魚釣)를 즐기면서 은거생활을 하다. |
• 1592년(41세) | 4월 13일에 왜적침입, 열읍와해(列邑瓦解), 수령 감사병사가 분둔(奔遁)하자, 현풍현신당(玄風縣新塘) 소재 선영(先塋)을 이평(夷平)하고 계모허씨(繼母許氏)와 일가권속을 낙동강우의 심곡중에 피난시킴. 4월 22일세간리에서 창의기병하여 정암진과 낙동강을 근거로의병활동을 전개. 순찰사 김수(金睟)의 죄목을 들어 이격토죄(移檄討罪), 의병 ․ 관병의 충돌, 초유사 김성일 (金誠一)의 거중조정, 진주성구원. 7월에 유곡찰방과 형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불부(不赴). 10월에 조방장에 승진되다. 상초유사(上招諭使), 답초유사(答招諭使), 통유도내열읍문(通諭道內列邑文), 격순찰사김수문(激巡察使金睟文), 창의시(倡義時) 자명소(自明疏) 지음. |
• 1593년(42세) | 5월 김성일(金誠一)의 상(喪)에 요곡(徭哭)하고, 명장(明將) 유정(劉綎)이 성주(星州)의 팔거현(八莒縣)에 진주하자 이습영장(肄習領將)으로 왕래하다. 6월 24일 부인김씨 卒함. 12월에 성주목사겸조방장(星州牧使兼助防將)에 제수되다. |
• 1594년(43세) | 악견산성(岳堅山城) 수축. 충용장군 김덕령(金德齡)과 서신교환. 산성수어지무(山城守禦之務)에 전심, 명군(明軍)의 영남이둔을 반대하다. 답김장군(答金將軍), 상체찰사이상국서(上體察使李相國書) 지음. |
• 1595년(44세) | 봄에 진주목사에 제수되다. 감사 서성(徐渻)으로부터 만류하는 서한 받았으나 가을에 기관귀향(棄官歸鄕)하다. |
• 1597년(46세) | 왜군 1번대 조령 통과 방어사(防禦使)로서 석문산성을 신축하던 중 정유재란으로 인해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킴. 8월 29일모상을 당해 가태리 비슬산록에 권폄(權窆)하고 강원도울진에 피지, 지상중(持喪中) 9월과 10월에 기복유지(起復有旨)를 받았으나 불기(不起)함. 사기복제일소(辭起復第一疏). 제이소(第二疏) 올림. |
• 1599년(48세) | 9월 10일에 경상좌도병사에 제수. 10월 19일 부임. 11월에 도산성수축편의사(島山城修築便宜事)를 조정에 계청하다. 기복제삼소(起復第三疏), 청선도산성장(請繕島山城狀) 올림. |
• 1600년(49세) | 상소 진가퇴지유(陣可退之由)하고 기관귀향(棄官歸鄕) 타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영암(靈岩)에 부처되다. 좌병사시 기관소(棄官疏) 올림. |
• 1602년(51세) | 적소에서 풀려나 비슬산에 입산, 벽곡찬송(辟穀餐松)하다. 영산현 낙동강변에 창암강사(滄岩江舍)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 편액하다. |
• 1604년(53세) | 봄에 찰리사의 명을 받고 성지형세를 순번하다. 5월과 8월에 선산부사(善山府使),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불부(不赴)하다. 10월에 부호군(副護軍), 11월에 상호군(上護軍)에 승진되다. |
• 1605년(54세) | 찰리사(察理使) 충무위사정(忠武衛司正),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제수, 3월에 승소입경(承召入京), 한성부우윤에 옮김. 8월에 인동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불부(不赴)하다. |
• 1607년(56세) | 1월 27일 한강 정구(鄭逑) ․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과 함께 용화산하 낙동강에서 선유회를 갖다. |
• 1608년(57세) | 광해군(光海君) 즉위. 7월 경상좌도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불부(不赴)함. 9월, 11월과 12월에 3차 상소하여 임해군(臨海君)의 처단과 전은론(全恩論)의 잘못을 거론하다. 사소명소(辭召命疏), 토역소(討逆疏), 척전은소(斥全恩疏)를 올림. |
• 1609년(58세) | 1월과 3월에 경상우병사와 삼도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불부(不赴)함. 7월에 부호군에 제수되다. |
• 1610년(59세) | 7월에 대호군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 8월 한성부 좌윤에 이어 함경도감사에 전임되자, 역관과 원접사 등의 명사접대 잘못에 대해 상소 극론(極論)하다. 9월에 시폐를 논한 상소를 한 다음 곧 하향, 해인사 백연암에서 수개월 머물다. 중흥삼책소(中興三策疏), 진시 폐소(陳時弊疏), 청죄통사원접사소(請罪通事遠接使疏) 등 올림. |
• 1613년(62세) | 3년 동안 강사에 머물다가 봄에 비슬산 조암에 들어감. 4월 17일 전라병사에 제수되었으나 불부(不赴). 6월 26일에 영창대군(永昌大君) 신원소(伸冤疏) 올림. |
• 1617년(66세) | 3월 발병, 4월 10일 강사에서 서거, 8월 현풍현 구지산 신당선산에 안장(安葬). |
• 1618년 | 사림이 현풍현 가태리에 충현사를 세우고 선생위판 봉안. 『망우집』초간본 간행. |
• 1674년 | 현풍현감 유천지(柳千之)의 주선으로 사당구지(祠堂舊址)에 서원을 창건하고 7월 25일 존재 곽준(郭䞭)의 위판과 함께 연향하다. |
• 1677년 | 서원에 예연(禮淵)이란 사액(賜額) 하달됨. |
• 1709년 | 증직 ․ 증시 운동이 사림에 의해 추진된 결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가 내리다. |
• 1771년 | 『망우당집』 중간본 오권 삼책 목판본이 예연서원에서 간행되다. |
• 1972년 | 대구망우당공원에 망우당동상을 건립하고 대구시에서 매년 4월 22일 의병기병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
• 1978년 | 국가에서 의령군에 충익사를 창건하여 휘하 17장령의 위패와 함께 봉안하고 매년 4월 22일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
• 1998년 | 대구망우당공원에 영남충의단을 건립하여 영남의 의병 315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6월 1일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