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당 곽재우 동상 기문

망우당 곽재우 동상 기문

忘憂堂先生銅像記文 (망우당선생동상기문)

 근세왕조의 선조 이십오년(宣祖 二十五年) 서기 일오구이년(西記 一五九二) 사(四)월 십삼(十三)일 섬나라 왜적들이 돌연 대거침입(大擧侵入)하여 일으킨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진실로 이 나라 미증유(未曾有)의 최대 국난(國難)이었다. 부산(釜山)에 상륙(上陸)한 수십만(數十萬)의 적병(敵兵)이 신기한 조총(鳥銃)을 난사(亂射)하며 파죽지세(破竹之勢_로 북상(北上)할 때 전국민(全國民)이 놀래어 망지소조(罔知所措)함은 물론이요 연도(沿道)의 수령방백(守令方伯)과 병사군관(兵使軍官)들까지 백성을 내버리고 사산도주(四散逃走)하게 되니 이십일(二十日)이 못가서 수도(首都)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두 달이 못가서 평양(平壤)이 점령되고 때를 같이하여 동북(東北)으로는 두만강(豆滿江)까지 왜적에게 석권(席捲)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이 나라 왕실(王室)과 정부(政府)를 평양(平壤)의 왜적들이 주저하고 추격(追擊)못한 이유(理由)는 어디에 있었던가 가장 직접적(直接的)인 요인(要因)은 뒷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으로 불리운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선생이 전국(全國)에 앞장서서 내 고장 의령(宜寧)을 중심으로 사(四)월 이십이(二十二)일 부터 향토방위(鄕土防衛)와 토왜구국(討倭救國)의 의병(義兵)을 모아 이끌고 침략해오는 왜적들을 연전연파(連戰連破)하게 되자 이에 호응궐기(呼應蹶起)한 각지방의병(各地方義兵)들이 저마다 왜적의 배후(背後)를 공격하며 견제(牽制)하게 된 때문이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호매(豪邁)하고도 영민(英敏)한 기질(氣質)에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무예(武藝)와 병학(兵學)에도 능통하였으나 사십세(四十歲)까지는 포의한사(布衣寒士)로 벼슬을 탐내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보내왔다 사십일세(四十一歲)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져서 국세(國勢)가 창황하게 되니 선생(先生)은 분연히 결심하고 사재(私財)를 기울여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소부대(小部隊)였으나 선생(先生)이 몸소 생명(生命)을 내대고 진두(陣頭)에나서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작전(作戰)으로 적세(敵勢)를 계속 격파(擊破)하게 되자 몇 날이 안가서 매우 정예(精銳)한 전투부대(戰鬪部隊)로 등장하게 되었다. 선생(先生)은 특히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의 유격전술(遊擊戰術)을 잘 사용하여 도강서침(渡江西侵)코자 하는 왜(倭)의 대부대(大部隊)를 정진(鼎津)에서 기습격파(奇襲擊破)한 이래 낙동강유역(洛東江流域)을 완전(完全)히 제압(制壓)하여 경상우도(慶尙右道)의 백성들이 안심(安心)하고 영농(營農)할 수 있게 함은 물론이요 호남(湖南)의 곡창지대(穀倉地帶)까지 능히 안보(安保)하게 되었으니 홍의백마(紅衣白馬)로 연강산야(沿江山野)를 동치서구(東馳西驅)하는 선생의 모습을 도처의 왜적(倭敵)들이 천강장군(天降將軍)이라고 일컬으며 망풍도산(望風逃散)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같이하여 천강홍의(天降紅衣)장군의 용명(勇名)이 온 국민(國民)의 사기(士氣)를 북돋우는 일방(一方) 왜적들의 기세(氣勢)를 여지없이 꺾게 되니 지금까지 무능무위(無能無爲)했던 감사(監司)와 군관(軍官)들이 시기(猜忌)와 중상(中傷)은 구국(救國)의 천강(天降)장군을 반역(叛逆)으로 무함(誣陷)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용감(勇敢)하고도 호담(豪膽)한 선생은 이에 구애(拘碍)하지 않고 오로지 토왜일로(討倭一路)에서 백전불패(百戰不敗)의 기록(記錄)을 세웠기에 조정공론(朝廷公論)도 결국(結局) 선생의 우국단성(憂國丹誠)을 재확인(再確認)하고 목사 병사(牧使 兵使)등의 중직(重職)을 제수(除授)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록(官祿)이나 탐낸 의장(義將)도 아닌지라 선생(先生)은 때마침 도래(到來)한 전국(戰局)의 안정(安定)을 이용하여 훌연이 사직(辭職)하고 귀향휴식(歸鄕休息)의 길을 택하였다. 그리하다가 얼마 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게 되니 선생(先生)도 할 수 없이 재기(再起)하여 방어사(防禦使)의 중책(重責)을 지니고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게된바 이소식(消息)을 탐지(探知)한 왜적들이 감히 일보(一步)도 접근(接近)못하고 우회도피(迂廻逃避)하게 되므로 인접제현(隣接諸縣)의 치안(治安)을 확보(確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전란(戰亂)도 다시 평정(平定)되니 선생은 또 다시 기관(棄官)하고 입산수도(入山修道)의 길을 택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아무리 높은 벼슬로 소환(召還)코자 하여도 사퇴(辭退)하고 불응(不應)하였다. 산하강사(山下江舍)에서 절연벽곡(絶煙辟穀)하고 송연(松葉)으로 연명(延命)하며 망우무욕(忘憂無慾)의 탈속(脫俗)한 수도생활(修道生活)을 계속하다가 신병(身病)이 침중(沈重)해도 스스로 의약(醫藥)을 불허(不許)하였고 육십육세(六十六歲)의 생애(生涯)를 고요히 마치게 된바 임종(臨終)에는 그래도「왜란(倭亂)으로 인하여 사직(社稷)과 능묘(陵廟)가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나도 죽거든 예장(禮葬)을 하지말고 무덤에는 봉분(封墳)하거나 식수(植樹)하지도 말라」고 유언(遺言)을 남기었다. 호왈(號曰) 망우당(忘憂堂)이라 하였으나 최후순간(最後瞬間)까지 우국충정(憂國衷情)만은 잊어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 역시(亦是) 망우당(忘憂堂)아니더냐 우리나라 역사(歷史)가 저 국란극복(國亂克復)의 양대지주(兩大支柱)로「육지(陸地)에는 곽재우(郭再祐)요 바다에는 이순신(李舜臣)이라」고 내세운 것도 가장 당연(當然)한 일이었다. 오늘에도 우리들은 정녕 비상한 국난(國難)에 직면(直面)하고 있는만큼 새삼 그 옛날 선생(先生)의 모습을 추모(追慕)하는 마음 간절하기에 이 동상(銅像)을 세워 영원(永遠)히 되살리고자한다.


일구칠이년 사월 이십이일

一九七二年 四月 二十二日


곽망우당기념사업회장 이 선 근 기

郭忘憂堂記念事業會長   李 瑄 根 記


건립주관 :   홍의장군곽망우당기념사업회

紅衣將軍郭忘憂堂記念事業會


전면글씨 : 박정희 대통령 (朴正熙 大統領)


글 : 이선근 (李瑄根)


글씨 : 최현주 (崔賢柱)


조각 : 김만술 (金萬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