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平和)를 사랑하는 겨레요 우호(友好)를 힘써온 나라임에도 이 강토에는 외침(外侵)이 끊이지 않았다. 그 중(中)에도 왜구(倭寇)의 발호(跋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일제강점(日帝强占)의 아픈 역사(歷史)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사백년전(四百年 前) 임란(壬亂)을 되새기며 영남의병(嶺南義兵)의 전적(戰績)을 살피고 충의단(忠義壇)을 건립(建立)하여 그 영령(英靈)을 봉안(奉安)하고 호국정신(護國精神) 계승(繼承) 추앙(推仰)의 장(場)으로 삼고자 한다. 1592년(年) 선조임진(宣祖壬辰) 4월 13일에 왜군(倭軍) 20만(萬)이 부산(釜山)으로 침입(侵入)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상(北上)하니 20일(日)만에 한성(漢城)이 합락(陷落)되고 잇따라 서북(西北)의 평양(平壤)과 동북(東北)의 회령(會寧)까지 점령(占領) 당(當)하며 왕가(王駕)는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였다. 왜군(倭軍)을 막아야할 연도(沿道)의 수령방백(守令方伯)이 패주(敗走)하니 지키던 성(城) 무너지고 시체(屍體)더미 쌓이어 아비규환(阿鼻叫喚) 곡성(哭聲)이 천지(天地)에 진동하며 강산(江山)은 초토화(焦土化)되었다. 이 때 민족정기(民族精氣) 되살아나 팔도각처(八道各處)에 의병(義兵) 승병(僧兵)이 궐기하고 전의충전(戰意衝天)하였다. 농민(農民)은 괭이 들고 부녀자(婦女子)는 치마폭에 돌 나르며 같이 싸웠다.
특히 영남(嶺南)은 지리적(地理的) 요충(要衝)이요, 의병(義兵)의 활동이 두드러진 곳이다. 곽재우의병장(郭再祐義兵將)이 의령(宜寧)에서 기병(起兵)하여 창녕(昌寧)의 적(敵)을 물리치고 낙동강(洛東江) 정진(鼎津)에서 왜적(倭賊)을 막아 호남진로(湖南進路)를 차단하였다. 이에 호응(呼應)한 낙강연안(洛江沿岸) 각처(各處)의 의병(義兵)이 올린 전과(戰果)는 남해(南海)에서 적선(敵船)을 격파한 제해권(制海權)과 아울러 전세(戰勢)를 호전(好轉)시켰다.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의 진주성(晉州城)과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의 한산도(閑山島)의 양대전첩(兩大戰捷)은 또한 영남(嶺南)에서 올린 대전적(大戰績)이었다.
본회(本會)는 임란관계문헌(壬亂關係文獻)을 섭렵(涉獵)하여 숨겨진 임란호국영남충의사(壬亂護國嶺南忠義士)를 찾아 명부(名簿)를 작성(作成)하고 감실(龕室)안에 제의사위패(諸義士位牌)로 봉안(奉安)하며 아울러 사림(士林)의 의정(議定)에 따라 315위(位)의 위패(位牌)를 별석(別席)에 모신다.
팔공산(八公山) 연봉(連峰) 바라보며 쉼 없이 흐르는 금호강변(琴湖江邊) 망우당공원(忘憂堂公園)에 우뚝 선 충의단(忠義壇)은 호국(護國)의 상징(象徵)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고양(高揚)시켜 주리라.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을 함양(涵養)하는 도장(道場)이 되리라. 충의단(忠義壇) 우러러보고 임란호국영령(壬亂護國英靈)을 추모(追慕)하며 무궁한 국운(國運)을 기원(祈願)하는 바이다.
1998年 4月 21日
임란호국영남충의단건립추진위원회
壬亂護國嶺南忠義壇建立推進委員會
위원장 심재완
委員長 沈 載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