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병의 주요 전투

영남의병의 주요 전투

* 모든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전투기간
전투명
의병장
임진 5월 4일
기강전투
곽재우
임진 5월 ~ 계사
고성지역전투
최강
임진 5월 말
정암진승첩
곽재우
임진 5월 말 ~ 계사 5월
화원지역전투
우배선
임진 6월 4일 ~ 5일
무계전투
정인홍, 손인갑
임진 6월 9일 ~ 10일
개산포전투
김면
임진 6월 17일
우척현전투
김면, 이형
임진 6월 17일 ~ 8월 8일
초계지역전투
전치원, 이대기, 곽율
임진 6월 22일
마진전투
정인홍, 손인갑
임진 7월 9일
안언전투
정인홍, 김준민
임진 7월 26일 ~ 27일
영천성 수복전투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임진 7월 말
현풍·창녕·영산전투
곽재우
임진 8월 1일
지례전투
김면
임진 8월
경주지역전투
김호, 이언춘
임진 8월 19일 ~ 20일
성주성전투(1차)
김면, 정인홍, 손승의
임진 8월 ~ 계사 1월
상주지역전투
이봉, 김홍민, 김각
임진 8월 20일 ~ 9월 8일
경주성 수복전투
박진, 정세아
임진 9월 15일 ~ 16일
사랑암전투
김면, 김시민
임진 9월 20일
인동전투
장사진
임진 10월 5일 ~ 10일
진주대첩
김시민 외 외원의병(外援義兵) 곽재우, 심대승, 임계영, 김준민, 최경희 등
임진 12월 14일
성주성전투(2차)
정인홍, 임계영, 제말
임진 ~ 계사
울산, 양산, 동래지역전투
김태허, 김정서
계사 1월 ~ 3월
안동지역전투
김해
계사 6월 22일 ~ 29일
2차 진주성전투
김천일, 최경회, 황진, 고종후, 서예원
정유 7월
화왕산성 수성
곽재우, 성안의 외 의병
정유 8월 16일 ~ 18일
황석산성전투
곽준, 조종도 외 의병
주요전투 정보

정암진은 삼가, 초계, 합천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임란 초기(5월말)에 적장 안국사(安國寺)의 중 혜경(惠瓊)이 정암진에 총공세를 취해왔다. 왜적은 정암진 부근이 늪과 진흙이 많은 것을 알고 선발대로 미리 높고 마른곳에 깃발을 세우고 다음날 건너려 하였다.

우리 의병은 이를 미리 알고 한밤 중에 왜적이 세운 기를 뽑아 진흙속으로 옮겨 꽂아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왜적이 과연 진흙 속에 빠졌으므로 우리 의군(義軍)이 이를 거의 전멸시켰다.

그 후 왜군의 대군이 쳐들어옴에 날샌사람 10여명으로 백마를 타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의 기를 세우고 산골짜기 깊은 곳에서 나누어 지키다가 적을 유인 추격하니 적이 놀라 달아났다. 그리고 살골짝 숲속에 있던 의병은 강궁으로 화살을 퍼부어 강언덕까지 추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강에는 기계와 목책을 설치하여 적선을 제압하니 소수의 병졸로서 왜적의 대병을 공격하였다. (이탁영(李擢英),정만록(征蠻錄). 이로(李魯),용사일기(龍蛇日記))

곽재우(郭再祐) 의병부대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의 대군(大軍)과 접전하여 정암진의 싸움에서 최초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 정암진의 대첩으로 왜장 안국사(安國寺) 혜경(惠瓊)이 강을 건너지 못했고 그 결과 호남이 지켜지게 되었다. (선조실록 권 26, 선조 25년 6월)

정인홍(鄭仁弘) 의군(義軍)이 낙동강안의 무계에서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으로 삼아 싸운 전투로서 고령 영병장(領兵將) 김응성(金應星) 성주 기군장(起軍將) 이승(李承)이 합세하여 임진년 6월 4일 밤을 틈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5일 여명에 왜적의 군막을 공격하여 불태우고 왜적을 압박하여 낙동강으로 멀리 나갔는데 현풍의 왜적이 구원해 오자 후퇴한 전투로 큰 성과는 없었으나 면밀한 작전계획과 능동적 공격의 의미가 있다.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亂中雜錄))

김면(金沔) 의군(義軍)이 임진년 6월 9일과 10일에 고령 개산포에서 싸운 전투로서 6월 9일 아침 적이 현풍의 쌍산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자 황응남(黃應男)이 정병 30여명으로 배 안으로 화살을 일제히 퍼부어 적병 80여명을 사살하고 적선 2척을 포획하였다. 6월 10일에는 적선1척을 포획하였다. 그 배에서 궁중보물을 비롯한 수많은 물품을 노획하였는데 이를 초유사에게 보냈다.(정만록) 특히 이전투에서 가장 공이 큰사람은 박정완(朴廷琬)으로 400여명의 군사를 모아 활동하였다. (문위(文緯), 모계일기(茅谿日記). 이탁영, 정만록)

정인홍(鄭仁弘) 휘하의 중위장(中衛將) 손인갑(孫仁甲)은 무용(武勇)이 비범한 장수로 처음 조정에서 동래현령으로 삼았으나 당시 동래가 적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아직 도임하지 못하던 차에 정인홍의 휘하에 들었다.

임진년 6월 22일 초계 마진에서 적이 약탈한 보화를 여러 배에 만재한 채로 낙동강상을 떠내려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손인갑은 곧 수병(手兵)을 거느리고 연안을 향하여 급히 달려가서 적선 11척을 공격하여 대승을 하고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초계의병장인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가수(假守) 곽율(郭율) 그리고 전제(全霽), 노세기(盧世麒), 정석조(鄭錫祚), 이해룡(李海龍), 변옥희(卞玉希), 이임(李紝), 안극가(安克家), 안철(安喆), 이윤서(李胤緖), 정석희(鄭錫禧), 김준(金俊), 이대약(李大約), 유세온(柳世溫), 전우(全雨) 등이 초계지역의 방어와 왜적의 낙동강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낙동강과 황강(黃江)에서 임진 6월 17일, 22일, 23일, 24일, 25일, 8월 8일, 등 누차에 걸처 토적(討賊)하여 적으로 하여금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활약을 펼쳤다.

그 후 임진 7월과 9월에는 정인홍(鄭仁弘) 의병대장의 령(令)으로 초계의병장 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와 가수(假守) 곽율(郭율)은 초계읍병(草溪邑兵)을 거느리고 성주․합천․고령․거창의 4읍 의병과 합세하여 무계(茂溪)와 성주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김덕진(金德珍), 이대기 전치원의 의병활동『南冥學硏究』제2집)

정인홍(鄭仁弘) 의군(義軍)의 가장(仮將) 김준민(金俊民)은 임진 7월 9일경 정인홍의 지휘 아래 2,8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주(星州) 안언에서 적을 공격 섬멸하였다.

이 전투는 성주 고령 합천의 의병이 참여하였으며 사원동(蛇院洞) 안언길에 진을 치고 6~7처에 군사를 매복하여 무계에서 성주로 짐을 싣고 이동해 가는 적을 김준민(金俊民), 정방준(鄭邦俊)이 사수를 이끌고 일시에 발사하여 많은 노획물과 그 장수를 잡고 왜적 400며명을 섬멸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우배선(禹拜善)은 임진년 5월에 창의한 화원지역 의병장이다. 휘하의 의병이 100여명 내외의 소의병부대이나 그 구성원이 오장(伍將), 대장(隊將) 궁인(弓人), 시인(矢人), 야장(冶匠), 궁수(弓手), 창수(槍手), 포수(砲手), 산척(山尺)등 매우 다양하였다. 의병활동지역은 낙동강과 금호강 달천과 감물천, 비슬산과 최정상(最頂上)을 무대로 왜적을 기습 추격 야작(夜斫), 미격(尾擊), 요격(腰擊)등 유격전술을 동원한 결과 그 군공책(軍功冊)에 기록된 임진 10월부터 계사(癸巳) 5월까지만 보더라도 사살 604명 척살 110명으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우배선, 창의유록(倡義遺錄))

우척현(牛脊峴)을 경계로한 거창(居昌)과 지례(知禮) 김산(金山)은 적의 전주 침공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또한 산악지대로서 게릴라전을 충분히 발휘한 산척(山尺)의 활약이 컷던 곳이다.

지례전투는 김면(金沔) 의군이 임란 초기에 거창 우척현(牛脊峴)에서 장곡역(長谷驛)까지 진격하여 왜적을 저지하고 지례를 공격하여 적을 소탕한 대첩이다. 왜적은 지례 주둔군을 강화하기 위해서 임진 7월 23일부터 전라도 무주에서 선발대 1,000여명, 후속부대 5~600여명, 후미부대 70여명을 지례로 이동 둔취시켰다. 김면(金沔)은 각처의 의병을 증파하고 초유사로부터 함양, 안음, 산음등의 의병 수천명을 증강하여 8월 1일 서예원(徐禮元), 황응남(黃應男)을 좌우(左右) 위장(衛將)으로 삼아 적진을 포위하여 분전 하니 일대의 적을 소탕하고 지례를 수복하였다. 그러나 아군도 50여명의 희생이 있었다. (정경운(鄭慶雲), 고대일록(孤臺日錄) · 이탁영, 정만록)

영천성은 임진 4월 22일 왜적이 무혈 입성하였는데 의병대장 권응수(權應銖)는 영천성(永川城) 수복을 위하여 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이를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이라 하였으며 그 규모는 영천(永川), 하양(河陽), 청송(靑松), 의흥(義興)등지의 관의병(官義兵)과 의성의 결사대 500명 등 4,000명에 이르렀다. 의병조직은 의병대장에 권응수(權應銖) 별장(別將) 김윤국(金潤國), 좌총 신해(申海), 우총 최문병(崔文炳), 중충(中總) 정대임(鄭大任)으로서 임진년 7월 26일부터 27일에 걸쳐 결사대 500여명이 성을 침공하고 또 화공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의 장수 법화(法化)를 참수하고 성을 수복하니 왜적 사상자가 500여명에 이르고 포로로 있던 양민(良民) 1,090명을 구조하였으며 아군 전사자가 83명 부상자 238명에 이르렀다. (정담(鄭湛), 영천복성기(永川復城記))

정암진 승첩이후 의령을 비롯한 인근 고을에 침입하였던 왜군이 전부 거름강과 낙동강을 건너 좌도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현풍 창녕 영산에 주둔한 왜군은 군세가 왕성하여 김해에 있는 적과 서로 통하고 요소에 진을 치고 도로를 확보, 성주와 연결하고 있었다. 곽재우(郭再祐) 의병대장은 정암진 승첩의 여세를 몰아 임진년 7월 하순 현풍을 위협해 가자 현풍의 왜군은 놀라 도주하였으며 창녕에 주둔해 있던 왜군들도 현풍 소식을 듣고 뒤따라 도주하였다. 그런데 영산에 주둔해 있던 적은 그 세력이 강한 것을 믿고 퇴각하지 않았다. 이때 아군측은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 부장 주몽룡(朱夢龍), 별장 윤탁(尹鐸)이 선두에 참전하였고 적군은 9번대로 주장은 우시수승(羽柴秀勝)과 휘하 부대였다. 곽재우 의병대장은 초유사 김성일에 청하여 의령 , 초계, 고령의 3현 병력을 동원하여 3일에 걸쳐 역전하였다. 왜군은 이에 맞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야간도주하였다. 이후 창녕을 통하는 길(우로)은 왜군의 왕래가 단절되고 오직 밀양-대구-인동-선산을 통하는 중로만 남게되었다.

(선조실록 권 26 선조 25년 7월조. 이긍익(李肯翊),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 16)

경주성 수복을 위하여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은 16읍(邑) 1만여명의 병력과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의병 5,000여명이 합류하여 임진 8월 20일에 경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언양(彦陽)으로부터 왜적이 일시에 기습해 옴에 따라 주력군 600여명이 전사하는 등 1차 수복전은 크게 실패로 돌아갔다.(정세아, 호수실기(湖叟實紀))

임진 9월 8일 병사 박진(朴晉)은 2차 경주성 수복을 위하여 미리 준비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쏘아 공격하니 성안에 있던 왜적이 놀라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捕)쪽으로 도주하였다.

경주성 탈환으로 영천에서 경주로 통하는 적의 후방 보급선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선조실록 권25, 선조 25년 5월 임신조. 호수실기 권5.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9월조)

김면(金沔)의군과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관군이 합동하여 김산(金山)에서 내침한 4,000여 왜적과 싸워 대승한 전투이다. 김산의 왜적에 대비하여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은 함양, 안음, 산음의 의병을 김면 휘하에 배속시킨 바 있으며 그후 경상우감사 김수는 진주목사 김시민으로 김면군을 부원토록 하였다.

임진년 9월 8일 목사 김시민은 많은 총탄을 가지고 정예병 1,000여명을 인솔 거창으로 출진 하였다. 김면과 김시민은 면밀한 합동작전 계획하에 9월 15일∼16일 사랑암에서 왜적을 마지하여 총탄 80통을 일시에 쏘고, 또한 활을 쏘아 적 수백명을 적중시켜 대승하였다. 이 전투로 전라도로 가는 왜적의 길목을 방위하였다.

(문위, 모계일기. 정경운, 고대일록)

임진년 10월의 진주성 전투는 진주대첩으로서 임진왜란 3대첩 가운데 하나로 꼽힌 반면 계사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는 함성(陷城)과 함께 왜적에 의해 대학살의 참극을 당한 전투로 끝났다. 2차 진주성 전투는 관군이 주도한 전투이나, 1차 전투는 영남 여러 지역의 의병들이 외원군(外援軍)으로 참전한 관의군 합동전투로 큰성과를 거두었다.

진주성은 경상우도와 호남을 보장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진주대첩은 임진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은 치열한 전투로서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왜적은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 장강충흥(長岡忠興) 등이 이끄는 2~3만명이고 수성군(守城軍)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이끄는 3,800여명과 민간인 수만명이다. 외원군(外援軍)은 합천, 초계, 의령 의병과 전라좌우 의병, 고성(固城) 관의병(官義兵)등 3,500여명이다. 이 전투로 왜적의 손실은 엄청났다. 아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목사 김시민이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선조실록 권33, 선조 25년 12월 신묘조. 조경남, 난중잡록. 이로, 용사일기)

대구지방 최초의 의병장 서사원(徐思遠)은 임진 7월 초집향병문(招集鄕兵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 창의토적(倡義討賊)하는 한편 쌀․ 콩 300곡(斛)을 모득(募得)하여 청도(淸道)의 예산성(禮山城)에 군량으로 보조하였다. 당시 대구의 사정은 오직 공산성(公山城)만이 의병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여러 인사들이 이곳에 모여 창의하였다. 이때의 창의한 인사를 보면 서사원(徐思遠)․정사철(鄭師哲)․최인(崔認)․손처눌(孫處訥)․채선수(蔡先修)․이종문(李宗文)․채몽연(蔡夢硯)․최계(崔誡)․곽재겸(郭再謙)․박충후(朴忠後)․이주(李輈)․유요신(柳堯臣)․손처약(孫處約)․최동보(崔東輔)․박충윤(朴忠胤)․홍간(洪幹)․정여강(鄭汝康)(이상 대구인), 이준(李埈)(상주), 권응수(權應銖(신령), 손계양(孫啓陽)(밀양), 조경(曺瓊)․정사진(鄭四震)․정세아(鄭世雅)(이상 영천인), 곽재우(郭再祐)(현풍), 황경림(黃慶霖)․김처(金처)(하양), 박형(朴炯)(청도), 최현(崔晛)(선산), 권악(權諤)․이의찬(李宜贊)․권응생(權應生)․이응벽(李應壁)․김응하(金應河)․이계수(李繼秀)․이세호(李世浩)․최해남(崔海南)․이눌(李訥)․김응택(金應澤)․최문병(崔文炳)(이상 경주), 이함(李涵)․백인경(白仁鏡)(영해), 조형도(趙亨道)(청송), 김천목(金天穆)․김현룡(金見龍)(연일), 김흡(金洽)(울산), 권사민(權師閔)․박협(朴協)․권흡(權潝)․권우직(權友直)․박태회(朴泰回)․유복기(柳復起)․유득잠(柳得潛)(이상 안동), 강극유(姜克裕)․이대임(李大臨)․신경일(申敬一)(이상 경기인)등이 있었다.

대구는 왜군의 작전상․군사상․교통상 요지에 있었으므로 의병창기(義兵倡起)가 우도(右道)나 상도(上道)에 비해 시기적으로도 늦었으며 의병활동도 극히 제한된 범위내에서 시종(始終)되었다. 그러나 서사원(徐思遠)․우배선(禹拜善)․이경원(李慶元)․채선길(蔡先吉)․장몽기(張夢紀)․최성원(崔成元)․배문범(裵文範)․박환생(朴還生)․전계신(全繼信) 등의 활약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인(崔認)은 동생 최계(崔誡), 조카 최동보(崔東輔)와 함께 해안(解顔)에서 창의하여 대구 화원 로방(路傍)에 의병을 매복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등 활약이 컸다.

(대구시사(大邱市史)․대구읍지(大邱邑誌) 서사원전(徐思遠傳))

이언춘(李彦春) 의병부대의 활동은 임진년 4월 23일 밤 태화강(太和江)입구 개운포(開雲浦) 근처에서였다. 한밤중에 왜적의 배 50여척이 포구에 돛을 내렸는데, 이언춘 의병군은 이상립(李尙立),심회령(沈希齡)등을 앞세우고 야습을 감행하여 약 80여명의 왜적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였으며, 다수를 바다에 수장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외에도 이언춘은 경주성 밖 남천(南川)에서의 전투, 영지(影地)전투 등에서 승첩을 거두었다.

(이언춘, 동계실기(東溪實紀) · 임진항쟁사(壬辰抗爭史))

한편 의병도대장 김호(金虎)는, 임진 8월 2일 언양현의 왜적을 치기 위하여 의병 1400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다가 경주 노곡(奴谷)에서 본대의 군사 500명으로 적의 퇴로를 포위하였으며, 후군 400명은 진사 최신인(崔臣隣)이 이끌고 반대쪽으로 이 적을 포위하였다. 선봉장 주사호(朱士豪)는 용력이 출중한지라 강궁(强弓)으로 수 없이 적을 쏘아 큰 승첩을 거두었다. 결국 김호는 이 노곡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아군은 이를 추격하여 다시 50여급을 참(斬)하였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서 임진왜란 중 경주에서의 수 차례 전투 가운데 이만한 승첩이 없었다고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 권2. 선조실록, 임진 8월 14일.)

이 지역은 임진왜란 기간중 왜적에 의해 장기적으로 점령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창의한 의병장과 의병들의 활동이 초기를 제외하면 주로 경주를 위시한 주변의 여타지역에서 벌어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정유재란시의 울산성 전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김태허(金太虛)는 병사 박진(朴晋)으로부터 울산의 가군수(假郡守)로 임명받아 창의하였다. 창의 초에 울산군내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군민들에게 나라와 민족이 존망의 찰라에 직면하였음을 호소하고, 가군수에 임명된지 한 달이 못되어 3,000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그는 박홍춘(朴弘春), 전응충(全應忠), 서인충(徐仁忠) 등의 의병장을 각기 역할에 맞게 편성하여 부산, 동래, 양산, 기장 방면과 해상방위에 주력하였으며, 여러 번에 걸친 육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고처겸(高處謙)은 울산에서, 안근(安瑾)은 언양에서 적을 물리치고, 김정서(金廷瑞)는 동래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임진영남의병사)

계사년(1593) 6월 22일-29일까지 8일간에 벌어진 진주성 혈전이다.

왜적은 임진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의 참담한 실패로 복수심에 가득찼고 또 호남진격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진주성 공세에 돌입하였다. 일부 수비병력을 제외한 전군을 동원하였는데 가등청정(加藤淸正), 소서행장(小西行長),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모리수원(毛利秀元)을 비롯한 제장과 93,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하였다. 아군은 창의장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 진주판관 성수경(成守慶), 사천현감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등 의관군 6,000∼7,000의 병력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8일간의 혈전 끝에 성이 함락되니 죽은 자가 민간인을 포함하여 6-7만명에 이르렀다.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이종인등 장수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김준민등 제장이 역전 끝에 전사하였으며 성안의 사녀(士女)들도 앞을 다투어 강에 투신하니 시체가 강을 메웠다. 이 전투는 왜변이 있은 이래 군민이 참혹하게 희생되고 의열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전례가 없었다. (선조실록, 권 27, 선조 26년 6월 갑신조)

대구지방은 왜적의 주력부대가 통과하는 지역이고 또 중병(重兵)이 주둔한 곳으로 일찍 의병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임진 4월 21일 왜적의 제 1번대가 대구에 입성함에 군민(軍民) 2,000여명이 공산성(公山城)에 퇴수(退守)하였다가 7월에 들어서 서사원(徐思遠)이 의병장이 되어 초모향병문(招募鄕兵文)을 내고 창의(倡義)하였다.

그 후 대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활약하던 의병장들이 병신년(丙申年)과 정유년(丁酉年)간에 3차례 팔공산에 모여 전의를 다지는 팔공산회맹을 성사(成事) 하였는데 1차 회맹은 병신년(1596년) 3월에 58읍(邑)의 422명이 참가하고 2차 회맹은 병신년(1596년) 9월에, 3차 회맹은 정유년(1597년) 9월에 회맹을 가졌는데 많은 인사가 참가하였다. (유정(柳汀), 송호일기(松壕日記), 정세아, 호수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