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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일본의 혼란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는 조총으로 무장한 살벌한 군사력과 무사계급의 팽창주의 심성을 이용하여 대륙침략의 야욕을 채우고자 하였다.
왜는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정벌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달라)를 내세워 조선의 의중을 떠보았다. 붕당과 사화, 숭문경무주의에 고식적인 평화유지에만 급급했던 조선은 처음은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으나 1590(선조23년)에야 마지못해 통신사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왜의 요구조건인 정명가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591년 초 귀국한 통신사의 보고는 정사, 부사 간에 상반되는 보고를 하여 전쟁대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은 1년여 동안 전쟁준비를 하여 자기를 태합(太閤)이라 부르게 하고 원정정부를 나고야(名古屋)에 두고 30만의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 중 약16만 명을 9번대로 나누어 조선출정 선봉대로 삼아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침입하여 마침내 7년간의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14일 부산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후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두 달 만에 평양과 함경도에 이르렀다.
이때 왜군은 부산성과 동래성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았을 뿐 크고 작은 고을을 지나오면서 큰 싸움 한번 치르지 않고 진격하였다. 왜군들이 들이 닥치면 그 지방의 수령과 방백들이 먼저 도망을 가고 숨어버림으로서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잃었던 것이다.
다만, 조선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명나라군대가 도착한 후 1593년 1월 평양성을 수복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변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공세에 밀린 왜군은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4년여 동안 강화회담을 진행하면서 철군하였다.
그러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 정유년에 14만 대군으로 다시 침입하여 남원, 전주를 거쳐 충청도 직산에까지 이르렀으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대패하고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저항하던 중 1598년 8월 전쟁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자 왜군이 철수하면서 그 해 11월 7년간에 걸친 전쟁이 끝이 났다.